*초대 교회의 형성과 발전
예수의 십자가 사건 후 도망갔던 제자들은 다락방에 숨어 지내다 부활한 예수를 목격하게 되고 성령을 받고 담대하게 예수를 증거 하게 된다. 그들은 공동체 생활을 하며 로마의 교통망을 따라 전 세계에 복음을 전하게 된다. 수많은 로마의 박해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아는 대로 교회는 계속 성장하게 된다. 메시아의 구원이 오직 유대인만을 위한 것이냐 이방인에게도 해당 되느냐는 초기 기독교의 큰 논쟁거리였다. 선민의식을 갖고 있는 유대인들에게는 그들에게만 G의 역사가 이루어지고 이방인에게는 아니라는 사상이 주류 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예수의 배다른 형제로 알려진 야고보(예루살렘 교회의 최초교부 라고 전해오고 있음)는 이방인 선교에 대한 회의적인 시각을 갖고 있었다고 전해지고 있으며 이에 반해 바울은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인해 모든 이는 믿음에 의해서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의견차이로 서로 대립되었던 적이 있다. 베드로와 바울은 로마에서 순교를 하게 되고 크리스천에 대한 박해가 강해지면 질수록 기독교인들은 숨어서 믿음을 지키며 계속 증가하게 된다. 초기의 교회 형태는 집에서 모이고 기도 하는 형태로 이를 가정교회 시대라고 한다.
당시에는 우리가 알고 있는 66권 보다 더 많은 경전이 사용 되어졌으며 구전과 전승에 의해 전파 되었다. 인쇄술이 없던 시대이기 때문에 양피지나 파피루스에 필경사가 한자 한자 심혈을 기해 기록 했으며 성경 한권을 쓰는데 약 10개월 정도 결렸다고 한다. 한권의 성서 필사는 필경사에게 엄청난 금액의 대가를 지불 하였기에 몇 권이 되지 않았고 교회의 보물로 인식되고 있었다. 당시에는 신구약 66권의 성서가 결정되어 있지 않았으므로 특히 신약은 없었으므로 구전과 전승에 의한 30여 가지의 복음서를 각자의 주장에 따라 다르게 해석되고 이해되며 교회가 사용하였다. 이에 2세기경 안디옥 교회의 교부 이레니우스(Irenaeus)는 혼란의 방지를 위해 영지주의적인 복음서를 배척하고 오직 마태 마가 누가 요한의 4복음서를 채택 확정하였으며 이후에도 여러 차례 교부회의(공의회)를 통해서 다시 4복음서가 정경임을 확인하였다. 신약 27권이 정경으로 확정된 것은 397년 카르타고 공의회이다. 그러나 최종 정경이 확립되기 전에도 다른 복음서를 사용하게 되면 이단으로 내 몰렸으며 그럼에도 4복음서 확립에 대한 치열한 논쟁은 오랫동안 계속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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