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생각하는 기독교/습작(習作)시대의 말씀

7. 그리스도와 자기발견

제주도11 2019. 1. 21. 19:31

1981.6.14     (돌아온 아들: 동서울교회 학생회설교)

1511-32일 읽고

1517-19

예수께서 하신 탕자의 비유는 세계에서 가장 훌륭한 콩트라고 이야기 되고 있으며 어렸을 때부터 수없이 많이 들었고 교회에서 배웠습니다. 읽을 때 마다 그 의미를 되새기며 또 다르게 해석하기도 합니다. 여기선 인생의 실패자에 대한 경멸과 극심한 참혹상을 그림처럼 묘사하고 있습니다. 이런 처참한 상황에 이르러야 자기의 본래적인 인간상에 돌아갈 생각을 한다는 것입니다. 자기 자신이 아버지를 떠나서 자기를 발견하기 위하여 떠나간다는 이야기입니다. 탈무드에 나오는 격언처럼 집나간 자식이 맨발로 걷게 되어야 비로소 아버지 집이 행복 했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라는 말처럼 아버지와 함께 있는 것이 행복 하다는 것을 알게 되지요. 나는 더 전개하기 전에 먼저 이야기부터 하나 하겠습니다.

미국 어떤 병원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Miss White라는 70이 넘은 은퇴한 교사이야기입니다. 그는 여러 가지 시련을 격어야만 했습니다. 복막염 하반신 불수 그래서 휠체어를 타야만 하는 어려운 삶을 살아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항상 웃는 낮으로 다른 사람을 대해주고 남을 위해 기도하며 대화를 나누곤 했습니다. 그런데 또 하나의 시련이 닥쳤습니다. 한쪽 눈을 수술 해야만 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병원의 몇몇 사람들은 늘 그를 위해 이야기 하며 성공적 수술이 되기를 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암 기운이 있어서 한쪽 눈마저 들어내고야 말았습니다. 그 후 두어 달 후 Miss White는 다시 병원을 찾았습니다. 어려운 시련을 겪으면서도 불평하지 않았던 그였지만 이젠 하나님도 야속 하시지. 이젠 그만 데려 가시지 왜 이 꼴로 살라고 이곳에 나를 또 보낼까?”이야기를 잠깐 여기서 그치고

위의 이야기는 7순이 넘는 Miss White가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모르는 자아집착이라는 병에 걸린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다 여러 형태의 자아집착에 빠져서 산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럼 자아집착이란 무엇일까요? “라는 생각에만 사로잡혀 있는, 나를 중심으로 한 상태를 말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벌써 그의 눈은 멀어져서 이웃의 참가치를 볼 수 없게 될 뿐 아니라 자기 자신도 바로 이해 할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결국 자기 자신을 위한다는 것이 자기 자신과 이웃의 패망만 가져 오는 것입니다. 이 같은 자아집착에 대해 생각해보면 4가지 정도로 요약해 볼 수 있겠습니다.

첫 번째

많은 사람가운데 자기 자신이 최고가 되려고 하는 형 어떻게 하든지 인기를 독차지해서 최고가 되려고 하는 형 다른 사람이 자기보다 더 인기가 있는 것을 볼 때 속이 뒤 틀린다면 병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런 사람들에겐 음악이건 운동이건 공부이건 무엇이든지 그 자체의 가치 판단 보다는 최고가 된다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합니다. 그러나 인간의 꿈이란 그림자와 같아서 앞으로 걸어가도 잡지 못하게 되고 애쓰면 애쓸수록 냉소의 대상이 되고 자신을 당황하게 만들어 자아집착의 병이 되고 맙니다.

두 번째

남이 어떻게 생각 하든지 간에 자기 자신을 위하여 자신의 힘을 휘둘러 보고 싶은 것입니다. 반드시 완력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지력 체력 지위 등으로 발휘 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왕좌를 차지한 그 사람은 항상 불안 하게 되고 더 강한 것이 나타날까봐 걱정을 하게 됩니다.

세 번째

자기 자신의 능력에 대해서 자신을 갖지 못 할 때도 병이 생깁니다. 험악한 생존 경쟁의 세상에서 스스로의 힘으로는 그 소중한 자아를 유지 할 수가 없다고 생각되어 강한 사람 밑에 들어가 늘 그들의 그늘 밑에서 비위나 맞추며 사는 형태를 말 합니다. 그러나 언제 상전이 자기를 버릴지 모르기 때문에 항상 불안이 떠나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네 번째

자기 삶에 대해 자신감이 없어 남과 같이 어울려 지내는 일을 피하려는 병입니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부자연한 일입니다. 남과 같이 어울려 깊은데서 주고받고 사는 삶 서로 이해하며 돕고 사는 것이 보람된 것 아닐까요?

위의 몇 가지 병에서 공통 되는 점은

첫째 모든 관심의 초점은 다 자기 자신이요. 부둥켜 않고 싸우는 근원은 모두 자기 자신의 불안에 있는 것입니다.

둘째 불안한 상태에서 벗어나려고 자기의 방법을 썼지만 이웃을 믿고 존경할 만한 자로 삼는 것은 건전한 인간관계를 갖지 못하는 것이다.

셋째 스스로 고안해 낸 방법은 문제를 해결 해 주지 못 한다는 것이다.

그러면 어떻게 이런 병에서 헤어 날 수 있을까?

탕자가 자기 자신을 찾지 못하고 결국 아버지를 만나듯이 그리스도를 만나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관심은 자기 자신에게 있지 않았습니다. 목자 없는 양의 무리가 그의 관심의 초점 이였습니다. 밤이면 고요한 곳을 찾아 무엇을 하여야 할지 하나님께 묻고 낮에 나가 저들의 발을 씻고 눈물을 닥아 주고 ....

실로 그는 남을 위한 삶의 연속 이였습니다. 그는 이렇게 자아집착에서 벗어났기에 주위에 있는 사람들을 그대로 볼 수 있었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그는 우리 자신을 비추어 볼 수 있는 완전한 거울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그리스도는 자아집착에서 완전히 해방 받으신 분이었고 자신을 완전히 남에게 줄 수 있고 그와 접하는 이들 역시 자유로울 수 있게 도우셔서 저들도 또한 남을 위해 살 수 있게 만드셨습니다. 그는 이렇게 자신을 죽이는 것을 밀알처럼 자신을 죽이는 것을 사는 길이라고 인생이 걸어야 할 참 길이라고 가르치신 것입니다. 그이와 생이 정면에서 부딪친 이들은 이 진리를 깨닫게 되었고 자신을 하나님 앞에서 확립 하게 될 수 있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들은 그리스도라는 거울을 통해 자신을 비춤으로써 그를 만날 때 자기가 발견 되는 것입니다.

다시 처음 예화로 돌아가서 Miss White가 자아집착에 빠져 있을 때 이런 음성을 들었던 것 이였습니다. “Miss White 나는 왜 하나님이 당신을 불러가지 않는지 알고 있습니다. 이 병원에는 Miss White가 해야 할 일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 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그리스도를 거울로 삼아보십시오. 생의 어떠한 풍파가 있어도 마음의 아무 동요 없이 생을 고맙게 사는 것입니다. 이 음성을 들은 그는 그 전처럼 모든 다른 환자들 에게 웃을 수 있는 좋은 친구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럼 다시 본문으로 돌아가 봅니다. 어떤 사람이 자기 자신을 발견 하려고 아버지의 품을 떠낫습니다. 아버지의 품을 떠난 그는 자기 나름대로의 방법으로 여러 가지를 해 보았습니다. 그는 아버지의 유산으로 사업을 크게 벌였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 사업은 자신의 사업 이였고 결국 실패를 맛보아야만 했습니다. 이 때야 비로써 자기가 살려면 아버지의 도움이 필요 하다는 것을 발견 합니다.

아버지 저는 하늘과 아버지 앞에 죄를 지었습니다. 이제 저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할 자격이 없습니다.” 라고 고백 하고 있습니다.

무엇을 말 합니까? 아버지를 통하지 않고는 자아집착 속에 빠져 허우적대고야 만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아버지의 품을 떠나는 삶을 삽니다. 그 것이 더 자기 자신을 개척 하는 길이라고 생각 하지만 결국 함정에 빠져 버리고 맙니다. 그리스도를 만날 때에야, 회개 하고 돌아올 때에야 자아집착을 버리고 진정한 자기를 찾게 되고 옳은 길을 걸어 갈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의 하나님 아버지

이 시간 우리는 늘 주님을 떠나는 생활을 하고 있는 것을 발견 합니다. 아버지 안에서 참 자유 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도록 도와 주시 읍소서. 그리스도의 거울을 늘 비추며 살며 그리스도인으로써 부끄럼 없이 살 수 있도록 도와주시옵소서.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합니다.